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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SGLT시리즈 2] 소금과 정원 - 할슈타트와 잘츠부르크, 3천 년 문명의 궤적

알프스 협곡의 소금 광산이 철기시대를 열고, 대주교의 정원과 모차르트의 도시를 낳기까지

등록일 2026년07월07일 15시41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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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의 협곡에 할슈태터 호수를 낀 좁은 산비탈의 마을인 할슈타트가 있다. 이곳은 유럽 문명사에서 소금이 어떻게 3천 년에 걸쳐 부와 권력,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846년 광산 감독관이었던 라미자우어(J. Ramsauer, 1795~1874)가 할슈타트 인근에서 대규모 선사시대 공동묘지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이후 수십 년에 걸쳐 1,300기가 넘게 발굴하였다. 그 부장품에서 청동 검과 철제 무기, 정교한 장신구, 마차 부속, 지중해산 수입품까지 쏟아져 나왔다. 이 유적은 ‘할슈타트 문화’, ‘할슈타트 시대(기원전 800∼450년경)’로 불리면서 유럽 초기 철기시대의 표준 유적이 되었다. 이 문화권은 서쪽 프랑스에서 동쪽 헝가리·발칸 서부까지 중부유럽 전역에 걸친 거대한 문화권을 대표하고 있다.


[할슈타트와 잘차흐강]

 

할슈타트(Hallstatt)의 ‘할(Hal)’은 흔히 켈트어로 ‘소금’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어원은 언어학계에서 논쟁적이다. 슈타트(Statt)는 독일어로 ‘도시’ 또는 ‘장소’를 의미한다. 잘츠부르크(Salzburg) 역시 ‘소금’을 뜻하는 잘츠(Salz)와 ‘성(castle)’을 뜻하는 부르크(Burg)의 합성어로 ‘소금의 성’을 의미하며,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 광산 중 하나로 꼽힌다. 잘츠부르크를 부유하게 만든 소금은 잘차흐강(Salzach, ‘소금의 강’)을 따라 운반되어 잘츠부르크의 경제를 일으켰다. 이 소금은 할슈타트가 아니라 그 남쪽에 있는 할라인(Hallein)·뒤른베르크(Dürrnberg) 광산에서 캔 것이었다.

 

할슈타트의 소금은 청동기 후기부터 지하 갱도를 파는 광업으로 이뤄졌고, 식품 보존과 교역에서 대체재가 없는 소금은 막대한 부를 제공했다. 그 당시의 물품이 상류층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문화가 소금으로 형성된 부를 발판으로 청동·철기 세공의 독자적 장인 전통을 보여준다. 이곳은 완제품이 흘러든 단순 집산지가 아니라, 생산과 교역, 소비를 결합한 복합 경제를 이루었다.

 

협곡에도 불구하고 교역이 몰린 이유는 사통팔달의 ‘교통 매개형’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자원 매개형’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화의 주체는 대체로 켈트족(원시 켈트족)으로 기원전 5세기경 라텐 문화로 이어졌다. 게르만족은 당시 스칸디나비아 남·북부 독일에 있었고, 두 집단의 본격 접촉은 기원전 1세기 이후이다. 4∼6세기의 민족대이동은 그보다도 훨씬 후대에 이루어졌다.

 

로마의 노리쿰 속주를 거친 뒤 중세에 잘츠부르크 대주교구가 소금 산업을 장악하며 신성로마제국 안의 황제에게 종속되는 영방으로 준독립적 정치체로 성장했다. 자체 화폐 주조권, 사법권, 군사권을 갖춘 이 대주교국은 느슨한 연방 속 준독립적 구성국에 가까웠다. 잘츠부르크 예술의 절정기인 18세기 후반의 모차르트 시대는 소금 산업이 여전히 활성화되어 대주교국 재정의 핵심축이었기 때문에 그 잉여가 궁정 후원으로 흘러갔다.


[미라벨 정원,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호엔잘츠부르크 성]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문화가 정원의 조성이다. 1606년 대주교 볼프 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는 애첩 살로메 알트와 그 자녀들을 위해 성 밖에 알테나우 궁을 지었고, 그의 몰락 이후 후임 대주교가 이 궁을 ‘미라벨(Mirabell, 이탈리아어로 ‘경이롭고 아름다운’)’로 개명했다. 이후 1690년경 대주교 요한 에른스트 폰 툰 치하에서 바로크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가 정원을 기하학적으로 재설계하면서 오늘날의 미라벨 정원이 완성됐다.

 

이 시기 유럽 궁정 정원은 프랑스 베르사유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의 조형 구조를 채용하였다. 좌우대칭의 화단, 직선으로 뻗은 축, 인공적으로 통제된 자연은 군주의 이성과 질서가 자연마저 지배한다는 정치적 은유였다.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들 역시 이 유행을 수용해, 미라벨 정원의 중심축이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호엔잘츠부르크 성을 정확히 겨냥하도록 배치했다. 정원의 시선이 곧 도시 전체를 관통하도록 하였다.

 

정원은 소금이 벌어들인 부가 궁정 문화의 한 형태로 응축된 사례로, 음악과 건축이 청각·시각적 표현이었다면 정원은 질서 감각을 공간에 제시하는 수단이었다. 이후 1854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이 정원을 시민에게 개방하면서, 오늘날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공 문화유산으로 전환됐다. 19세기 이후 냉장·방부 기술로 소금의 전략적 가치가 무너졌을 때, 이미 도시는 건축물과 음악 전통이라는 자립적 문화자본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자원에서 문화로, 다시 대중적 유산으로’ 이어지는 전환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잘츠부르크의 문화와 예술]

 
신구학보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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