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긍정’ / 긍정심리학
물리치료과 2012110017 이한나
중학교시절 내 꿈은 무척 컸다. 여성 경찰이었던 김효정씨가 내 롤 모델이었고, 난 그 분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미래의 꿈을 설계했다. 범죄가 일어났을 때 소외받고 상처받기 쉬운 피해자가 또 다른 심리적 고통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피해자의 정신적인 충격을 줄여주는 피해자 심리 전문요원인 CARE요원의 되고 싶었다. 그 당시의 난 범죄에 노출되어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 꿈의 계기는 아주 간단하다.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비행 청소년으로 치부되는 아이들이 내 친구들이였다.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의 친구들이 혹은, 자신의 아이들이 비행 청소년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괴로움에 떨고 있다. 내 친구도 그들 중 하나였고 그 친구는 그 당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버터내기 힘들어 했다. 난 CARE요원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중한 친구의 괴로움 하나 도와주지 못했다. 정말 소중한 친구였지만 난 그 애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꿈도 꿈 이였지만 내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그 애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서 안타까웠고 괴로웠다. 그렇게 그 친구 옆에서 동고동락을 같이하며 난 그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았다. 청소년 쉼터도 가보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도 해보고 도서관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심리학에 관련된 책까지 들춰보게 되었다. 많은 책들 중에서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 심리학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학’이란 말이 포함되어있는 책은 은연중에 따분하다고 생각 할 만하지만 처음엔 친구를 위해서 읽었다. 한 중간쯤 읽었을 땐 나와 관련된 내용이 많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친구를 위해 읽게 된 심리학책이지만 한 장 두 장 읽으면서 도움을 받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친구뿐만 아니라 나도 포함되어 있음을 느꼈다.
‘비관주의자는 자신의 실패나 좌절을 대단히 자멸적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은연중에 실패나 좌절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며, 그것이 자신의 삶을 영원히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본문 中에서)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에선 이 두어 절 되지 않는 구절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두 줄밖에 안 되는 글이지만 그 글을 통해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비관주의적인 생각으로 내 자신을 버려두고 스스로 검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위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한 번의 커다란 실수(실패)를 통해서 커다란 마음에 무거운 짐을 만들고 그 짐이 생긴 이후로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 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울지 못한다. 커다란 실수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그 현상은 지속되었다. 물론 크게 넘어져 눈물이 핑 돌순 있어도 감정적으로 울진 못한다. 친구들이 ‘마음이’라는 영화를 볼 때도 그 유명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볼 때도 친구들이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는 모습만 멀뚱멀뚱 볼뿐 난 눈물은커녕 콧물하나 흘리지 못했다. 심지어 주위에선 독한 애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니 말 다했다. 심지어 정말 울어야 되는 상황에서도 울지 못하니 어른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병원을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문제가 있다는 둥 야단을 피시지만 난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내가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을 나가시면 저녁 늦게 돌아 오시고어머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아프시니 내 스스로 동생을 돌보고 장녀노릇을 하느라 내가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속으로 눈물을 삭히는 버릇으로 인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난 그 시기 동안은 적어도 간간히 너무 힘들면 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난 왜 지금은 울지 못할까.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울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 스스로가 나 자신이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난 오랜만에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며 놀았다. 간병 때문에 친구들이 놀 때 놀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토라진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아 아버지의 전화조차 받지 못했고 나중에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가신 후에야 난 뒤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리지 못했던 것에, 마지막 순간 친구들과 떠들며 놀았던 것에, 난 스스로 실망스럽고 죄스러웠다. 내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물론 내가 알고 그랬던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에 상처는 매우 컸고 난 장례식에서 조차 울지 못했다. 그 이후로 난 울 수 없었다.
마틴 셀리그만의 비관주의자의 삶에 비교해 봤을 때 난 비관주의자에 꼭 들어맞았다. 단 한순간의 실수(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노래방에서 놀았던 일)로 인해 난 자멸적으로 해석하여 내 스스로를 자책하고 내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날의 일이 오랜 시간 문득 문득 오버랩 되어 내 정신 옭아매고 있었고 내 자신을 힘들게 했다. 한 두 달이 아니라 2~3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영혼을 갉아먹듯이 오랜 시간동안 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이 죄책감으로 인해 난 성인이 된 지금 까지 무언가 잘못 되었을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은연중에 그 원인을 나에게서만 찾고 스스로 자책했다. 단 한순간의 계기로 인해 스스로를 점점 학대하고 비관주의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난 내 스스로가 나에게 주어진 나의 행복을 거부해왔던 것이다.
난 ‘행복’을 잘 몰랐다. 아니, 애초에 행복한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행복하기를 거부하고 행복을 만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틴 셀리그만은 행복을 이 세상 어떠한 보물보다 더 값지게 여기고 강조했다. ‘행복’을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인간이 도달해야할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그는 심리학의 초점을 인간의 긍정적인 정서에 집중해 보통 사람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난 그의 저서를 읽으면서 내가 나의 가치를 스스로 버리고 살았던 것을 알았다. 스스로를 아끼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내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보통 심리학자나 심리학에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면 어떻게 하면 정신적인 문제에서 빠져나갈지에 포커스를 맞추고 괴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어지지만 그는 달랐다.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지 해답을 찾게 해주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행복을 찾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행복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 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한 번의 실수로 비관주의자가 된 나 또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따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행복을 찾도록 했다.
행복을 얻기 위한 그의 독특한 관점은 무엇보다도 ‘행복도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난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리 가정을 싫어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편안해야할 집이 나에겐 감옥이었고 철없이 어린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다. 항상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에 어머니가 챙겨주시는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다른 집 아이들을 부러워했고 시기했다. 학교에서 학부모 참관일 때 엄마 손 잡고 오는 아이들이 미웠고 주말이면 오순도순 가족과 소풍을 다니는 그런 아이들을 시기했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그런 행복한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다른 집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이었으면 했고 집에 가면 항상 누워있는 나의 어머니가 야속했다. 어렸을 때 일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 둘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생각보다 커져서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보다. 그렇게 상처를 마음속에 묻고 있었던 나에게 마틴 셀리그만은 명쾌한 처방전을 내려주었다. 그가 말하길 외적인 자극을 이용하여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하면 즉, 외적인 곳에서 행복의 답을 찾으려고 하면 끝내는 공허함과 행복의 불확실성, 정서적인 우울증에 빠지게 되어 결국 죽을 때까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놓여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외부에서 주는 행복감은 단 한 순간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지만 그 외부의 요소가 없어지면 끝내는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커다란 공허함을 느끼고 쉽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지만 결국 행복 또한 자신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가치’인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행복이라는 소중한 가치도 누구는 가지고 누구는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도 얻고 싶으면 얻을 수 있는 공평한 보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낙관주의자는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실패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극복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어느 특정한 한 상황에 한정된 것이고 다른 사람이나 일시적인 상황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라 해석한다.’(본문 中에서)
아인슈타인의 긍정의 일화를 선생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현재 천재로 칭송받고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유명한 박사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정말 지지리도 바보스러운 행동으로 선생님께 많이 혼나기도 했다. 훗날 학자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그의 집은 정말 가난하고 궁핍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시절은 무척 가난하여 빵 한 조각과 물만으로 식사를 해결해야할 때가 많았는데 친구들이 아인슈타인의 초라한 식사를 보며 놀라서 그렇게 힘들면 도와 줄 텐데 왜 말 안했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훌륭한 만찬이 어디 있냐며 웃었다고 한다. 자신의 식사는 소금, 설탕, 베이킹파우더, 달걀, 물, 밀가루까지 곁들여서 식사를 하고 있다며 빵 한 조각이지만 자신에겐 더없이 훌륭한 만찬이라며 그의 식사를 표현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자신의 앞날은 알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미래의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긍정의 힘은 그의 도전정신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고 그가 학자가 되는데 커다란 재산이 되었을 것이다.
좋은 일은 영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설명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일시적이고 특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낙관주의) 힘든 일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며, 자신이 성공했을 때 그 기회를 한껏 살린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을 일시적이고 특수한 경우로 받아들이고 실패는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비관주의) 실패를 자신의 삶 전체에 전이시켜 오랫동안 실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본문 中에서)
모두가 초등학교 시절 긍정의 힘을 배웠을 것이다. 물 한 컵을 놓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물의 양이 달라진다. 물리적으로 물의 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느끼기엔 그 물이 충분할 수도 너무나 부족할 수도 있다. 모두가 배우고 모두가 아는 것이지만 쉽사리 긍정적이게 삶을 살기란 매우 힘들다. 나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비관주의자였다. 내 주위의 환경을 탓하고 내가 저질렀던 실패를 그게 다 인양 내 삶의 영원히 묶어두려고 했다. 내 스스로를 불쌍할 정도로 미워하고 혐오했으며 나에게 주어진 행복 또한 외면하고 무시했다. 내 주위 환경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닌데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려 들고 좌절하고 주저앉았다. 이때 내가 긍정의 힘을 조금만 더 일찍 자각했다면 어린 시절의 나는 조금 더 밝은 삶을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는 너무 어렸고 아직 나에겐 많은 삶이 남아있으니 지금이라도 긍정의 힘을 제대로 공부하고 영위해야한다. 아무리 어렵고 고단한 삶이어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달라진다. 이렇듯 나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바꾸기 위해선 습관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긍정의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 힘을 키우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긍정적 정서에는 크게 세 가지, 즉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가 있다. 이 세 가지 정서는 따로따로 함양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감사와 용서, 그리고 결정론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배양하려면 저절로 떠오르는 비관적 사고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반박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는 아주 대조적인 쾌락과 만족으로 나뉘는데, 이것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본문 中에서)
특히 지금에 내게 있어서 가장 날 괴롭히는 건 과거의 과오였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서 내가 과거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를 끓어 올리려면 감사와 용서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용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서에선 용서에 이르는 길(REACH)은 총 다섯 가지의 지침이 있다. 용서에 이르는 길 (REACH) 약자로써R=recall: 자신이 받은 상처를 돌이켜 생각 하는 것,E=empathize : 감정이입으로, 나에게 피해를 준 이유가 무엇인지 가해자의 입장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하는 것, A=altruistic gift : 용서가 곧 ‘이타적인 선물’임을 상징하는 머리글자, C=commit : 공개적으로 용서를 행하는 것, H=hold : 용서하는 마음을 굳게 지킨다는 의미로 용서란 원한을 말끔히 지워 없애는 게 아니라 기억 끝에 달려 있는 꼬리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REACH의 지침을 따르면 용서에 이룰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즉, 나에게 있어서 상처받은 사건이나 괴로웠던 사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해서 나에게 피해를 준 원인(자신을 혐오하게 된 일등)을 찾고 그 일을 저질렀던 입장(어린 시절에 마음껏 친구와 놀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가 결국 상대방과내 자신에게 있어서 행복을 부르는 선물임을 자각해 용서(어린 ‘나’를 용서함)를 행하는 것이 용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해선 그 옛날의 어린 ‘나’를 이해하고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위해서 어린 ‘나’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는 쾌락과 만족으로 나뉘는데 현재에 대한 만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긍정적인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족과 쾌락은 잘못 추구하면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