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2003
영화 제목만 보면 감성적인 피아노 연주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을 주인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아주 세세하게 묘사했다. 2003년에 개봉한 뒤 2015년에 재개봉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비참함을 끝난 뒤에는 많은 여운을 주는 「피아니스트」를 소개한다.
인간의 잔혹함과 생존본능
영화는 148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내내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독일군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유대인 거주구역을 지정해 유대인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저녁 식사 중인 집을 기습 침입해 휠체어를 탄 노인을 창문 밖으로 떨어뜨리는 등 온갖 잔인한 짓은 모두 저지른다.
거리엔 굶어 죽거나 총에 맞은 시체들이 즐비하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피곤함과 지침만이 가득하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희망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미래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아닌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말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사람들은 처절하게 삶을 꾸려간다.
종전 직전, 독일군이 은신처를 모두 파괴해 정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상황에서도 슈필만은 폐허가 된 집의 다락방에 몸을 숨기고 버틴다.
폐허가 된 그 속에서도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유대인을 향한 독일군의 학대와 학살이 심해지고, 도둑질과 소매치기가 일상이 된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모두가 힘들고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을 숨기고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사람도 있고, 추위를 피하고자 독일군의 코트를 입는 주인공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슈필만의 한가지 행동이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숨어 사는 은신처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낸다. 폐허가 된 주택에서 마주친 독일군이 피아노를 쳐보라는 말에 머뭇대다가 음악에 심취해 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행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단 하나도 없는 그 속에서 슈필만이 종종 피아노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행동은 영화 내의 유일한 희망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영화는 주인공 슈필만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지나가는 단역들을 통해 전쟁이라는 배경을 부각한다. 은신처에서 아이 울음소리 때문에 발각될까 두려워 아이를 죽인 어머니부터 유대인 거주구역으로 몰래 들어오려다 맞아 죽는 어린아이, 독일인의 재미 들린 학살로부터 도망치다가 총을 맞아 죽는 남자까지 그 사연은 다양하다.
무차별적인 학대에 맞서 싸우는 유대인들과 은신처에 숨어지내는 주인공을 핑계로 모금을 받은 돈을 들고 도망치는 기술자까지 영화를 통해 각양각색의 인간상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인간상을 마주하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거지보다 못한 환경에서 삶을 꾸리는 주인공이 영화 마지막에 깔끔한 모습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폭격 때문에 마무리하지 못한 쇼팽의 녹턴 20번을 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도감보다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몰려온다.
곽서윤 기자 kwmin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