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박지원 지음/김혈조 옮김/돌베개
“종종 턱이 빠질 정도로 웃게 만드는 책”, 당대 지식인이 「열하일기」를 평가한 말이다. 정조도 “익숙히 읽어보았다”고 밝힌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중국의 풍속과 지리, 문화 등 갖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기록한 백과사전이자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해학과 풍자가 담겨진 작품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추천 고전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지만 그 옛날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실감하기 어렵고, 양이 워낙 방대한 탓에 흔히 작품 중에서 일부만 발췌되어 읽히곤 한다. 하지만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으로 평가받는 박지원의 진가는 아직까지 유효하기에 「열하일기」를 한 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면 책을 덮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 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이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가 고희를 맞아 조선에서 축하 사절단이 구성됐는데, 박지원의 8촌 형인 박명훈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사신의 친척 중 젊고 똑똑한 사람을 수행단에 포함시킬 수 있었기에 박명훈은 박지원을 수행단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 박지원은 43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의 제자인 박제가가 일전에 청나라에 다녀온 것을 상당히 부러워하던 차였기에 흔쾌히 중국에 다녀오게 된다.
흔히들 우리나라를 일컬어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사신단의 여정은 육로로 삼천리 이상이었다. 압록강-심양-북경까지가 원래의 행로였지만, 건륭제가 열하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됐으며, 이 때문에 「열하일기」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열하일기」는 총 26권 10책으로 구성되며 1~5책은 여정 중심으로 작성돼 있고, 6~10책은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들은 것을 바탕삼아 주제별로 작성돼 있다.
그 중 ‘관내정사(關內程史)’는 산해관~북경에서의 기록으로, ‘호질(虎叱)’이 실려 있으며,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신들과 밤을 지새우며 나눈 이야기를 모은 ‘옥갑야화(玉匣夜話)’에는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그 외에도 과학, 문화(마술, 문학, 미술, 연극, 음악), 역사, 유적, 의술, 제도, 종교, 지리, 철학 등 박지원이 5개월 동안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줄곧 「열하일기」의 저술에 몰두해 1783년에 붓을 내려놓았다. 「열하일기」는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양반 사회의 허구성과 북벌(北罰)의식을 비판해 조선 각계각층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식인들의 형식적인 글과 권위주의에서 탈피해 하층민들과 주고받은 농담을 그대로 쓰고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는 등의 파격적인 형식에 환호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정조는 당시 새롭게 유행하는 문체를 걱정하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실시해 고전(古典)의 순수한 문체로 돌아가라고 신하와 선비들에게 명했다. 또한 새로운 문체의 첨단을 달린 격인 박지원에게도 “요즈음 문풍이 이와 같은 것은 박 아무개(박지원)의 죄가 아님이 없다. 열하일기는 나도 이미 익숙히 읽어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기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로 문체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문제를 만든 자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속히 한 가지 순정한 글을 지어 곧바로 올려 보내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한다면 비록 남행의 문임이라도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명했다. 이러한 현상은 「열하일기」가 탄압받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었음을 반증한다.
「열하일기」에는 청나라와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이 발전하길 바라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박지원의 북학사상은 개화사상에 영향을 줌으로써 전통 사상과 근대 사상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우리 시대에 열하일기를 다시 읽어보며 법고창신의 정신을 이어나가길 바란다.
임예슬 기자 yim__@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