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니터로 접한 시커먼 충격에 잠겨서 내내 허우적대다 푹 젖은 눈이 다 마르기도 전에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나와 4살 터울이 나는 사촌 언니였다.
“언니, 항암 치료가 뭐야? 우리 엄마 죽는 거야?”
엄마의 투병 생활을 알게 된 당시 나는 고작 중학생의 나이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크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큰 가방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서서,
“엄마 잠시 병원에서 지내다 올게. 금방 올 거야. 걱정하지 마.”라며 아직 어리고 여린 두 딸에게 아픔이나 슬픔 따위를 내비칠 수 없었던 엄마의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무너지지 않는 편이 더 이상했다.
엄마의 투병 생활에 대해 알기 전, 그저 엄마의 입원이 드라마에 으레 나오는 모습처럼 일반적인 것이라 착각한 나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가 아침에 혼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다 큰 것 같다는 뿌듯함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원체 잠귀 어두운 내가 그날따라 방문 사이로 굴러들어 온 밝은 불빛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살금살금 걸어가 방문 틈새를 통해 바라보면, 거실에는 큰외숙모와 아빠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당최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들려오는 것이었다. 엄마가 암 환자라고? 항암 치료? 그 순간, 언젠가 엄마가 애청했던 드라마의 주인공이 자신은 암에 걸렸다며 가족들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손이 벌벌 떨렸다. 이튿날 오후까지 혼자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켰다. 당시에는 암이 지금처럼 완치율 높은 질병도 아니었을 뿐더러, 전문적인 지식 없이 질문글에 답변을 작성하는 유저가 많았다. 결국 나는 내가 밤새 부정하고 부정했던 답변들을 주르륵 받게 되었고, 끝내 눈물이 왈칵 터져서 사촌 언니에게 늦은 밤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후 내 일상은 크게 무너졌다. 어렸던 나는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냈다. 수업을 듣는 도중에 허공을 보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든가, 하굣길에 힘이 풀려 바닥 위로 털썩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든가, 성한 내 머리카락을 억지로 쥐어뜯었다. 그런 깊은 어둠에 빠져들면서도 끝까지 모든 것을 숨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차마 따져 묻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엄마가 암 환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죽기보다 싫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변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 인정하는 순간 엄마가 내 손을 놓아 버릴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마치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에게 내리는 가혹한 장댓비처럼, 자라는 내내 큰 어려움 없이 사랑만 받고 자란 나에게 엄마의 투병 생활은 너무나도 어두운 공포였다. 떼만 쓸 줄 아는 철부지를 그래도 자식이라고 항상 예쁘다 품는 그런 엄마였다. 당신이 먹고 싶은 과일이 보여도 고작 몇천 원 아끼겠다고 발길을 돌리면서, 자식이 좋아할 법한 과자는 장바구니에 꼭 몇 봉지씩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엄마였다. 엄마가 내게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나를 무너지게 만든 것도, 나를 다시 일으킨 것도 바로 엄마였다.
“민지야, 미안해. 엄마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나중에 통화하면 안 될까?”
오랜만에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후에 알기로, 그때 엄마는 항암 치료가 막 끝난 후라 전화도 받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마다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통화를 꺼리던 편이었는데, 막상 1분도 채 되지 않아 전화가 끊어지자 눈물이 순간 멈추었다. 병든 당신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 때에 매번 물기 어린 자식의 목소리를 듣는 어미의 심정이 아주 조금이나마 헤아려졌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엄마가 없는 집에서 엄마와 했던 약속들을 지키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부터 횡단보도의 신호를 철저히 지키는 것까지, 낮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깊게 반성하기도 했다. 이는 멋모르고 비뚤어진 내 과거에 대한 속죄를 어쩌면 엄마가 대신 행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괜한 조바심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다.
엄마를, 어쩌면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든 많은 습관들 중 가장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였다. 매일 밤,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우리 엄마를 데려가지 말라고, 내게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힘차게 살겠노라고, 그것마저 안 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나를 대신 데려가라고, 그렇게 몇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기도했다.
지금 돌아보면 삼일 안 새색시도 웃을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나는 어린 나이로 종종 죽음을 준비했던 것 같다. 신이 엄마 대신 나를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진득하게 닿았기 때문에 쓰레기로 가득해 지저분한 가방을 정리하거나 손톱과 발톱을 정갈하게 깎고는 했다. 당시의 나는 그 어떤 부분에서도 장난기 따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주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어쩌면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없는 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초록빛 싱그러운 옷을 걸친 나무가 어느새 거무스름하게 변한 옷을 떨구어 버리고 따뜻한 봄옷 입기를 몇 번, 아니, 딱 여덟 번을 지나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현재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완치 판정을 받게 되었다.
18살 무렵, 아무도 모르게 장식장 바닥에 놓인 엄마의 수첩을 훔쳐본 적이 있다. 그 안에 적힌 유서를 보며 가슴을 치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편지의 형식을 한 엄마의 유서는 총 4장이었다. 마지막 장은 외가댁 식구들에게, 세 번째 장은 아빠에게, 두 번째 장은 내 동생, 그리고 가장 첫 번째 장은 첫딸인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엄마가 정말 바보 같다고 느꼈던 건 4장의 유서 전부 나와 내 동생, 우리 두 자매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완치 소식이 들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내 기도가 빛을 발하기도 했겠지만, 자식만 보고 평생을 산 엄마의 일생에 감동한 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들 걱정으로 눈물 흘렸을 엄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준 것이라고,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종종 나를 만나 깊은 속내를 털고 대화해 본 사람들은 말한다.
“가족을 위해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의 행복을 찾아야 해.”
휴학하는 기간 동안 만나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게 된 카페의 사장님께서도 매번 비슷한 충고를 해 주셨다.
물론 나는 그들이 내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의 암 판정 후에 내 세계는 철저히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런 내 모습에 장난스레 나를 마마걸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고, 지나친 것 아니냐며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종종 우리 엄마까지도,
“너는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살래?” 하며 물을 정도이니 그들의 반응을 납득하는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유난스럽게 가족애가 강해지다 못해 심각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게 행복을 안겨 준 순간들을 되짚어 본 이후, 나는 다짐했다. 나만의 행복을 찾되, 그 1순위는 가족이며 2순위도 가족이 될 것이라고.
나의 짧다면 짧은 삶 동안에 가장 큰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은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외국어 영역 1등급을 손에 넣었을 때도, 아르바이트 첫 월급을 받았을 때도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엄마를 마주할 때였다. 그리 곱던 손이 갖은 고생에 거칠어졌는데도 내 손에 먼저 장갑을 끼워 주는 엄마를 끌어안았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추운 겨울날 3시간을 꼬박 걸어 아낀 버스비로 체리를 사갈 때마다 아이처럼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알았다. 지독하게 어둡고 깊은 절망도 어느 순간 봄꽃을 피워내,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꽃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게 행복이란, 엄마가 가꾼 꽃밭에 가장 예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는 꽤나 무거운 정의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