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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아주 오래된 농담」

등록일 2016년03월08일 19시07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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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박완서/실천문학사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등장인물인 유현금은 강변북로에 어둠이 깔리는 시간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아주 오래된 농담의 흐름 또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따라 흐른다. 주된 배경으로 설정된 대학병원과 재벌가에 고학력의 높은 지위에 있는 중장년층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 상류층은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크고 작은 허영과 속물 근성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아주 오래된 농담의 주제 의식은 등장인물인 심영묘의 상념으로 요약된다. 그녀는 중산층의 막내딸로서 재벌가인 시댁에서 겪는 이질감과 낯설음을 인간끼리는 통할 수 있는 마지막 공통점,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배반당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대학병원의 내과의로 일하고 있는 심영빈은
40대의 성공한 의사다. 교사인 부인과 두 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로서 충족된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어쩐지 허무하다. 까마득한 초등학생 시절 철없이 자신을 놀렸던 동창생인 유현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는 허무함의 기제이자 일탈의 기폭제가 된다.


어느날 그는 우연찮게 자신의 병원에서 현금을 마주친다
. 잘빠진 몸매에 착 달라붙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첫인상처럼, 거리낌없고 자유로운 기질의 그녀에게 영빈은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둘은 금세 내연 관계에 빠져든다.


영빈의 곁에 여기 또다른 여자가 있다
. 현금도, 그의 아내도 아니다. 티없이 곱게 자란 십여 년의 나이차 나는 여동생 영묘다. 출생부터 지켜봐온 여동생은 훤칠한 재벌가의 자제와 결혼한 지 3년도 채 안되는 새색시다. 영빈은 영묘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나가 그녀의 남편인 송경호가 폐암을 앓고 있으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영빈과 현금에서 영묘와 경호에게로 이동한다
. 영묘의 시댁인 Y건업은 랭킹 50위에 드는 재벌기업이다. 누누이 오빠 그 집은 좀 이상해. 우리 집하고 많이 달라. 그렇지만 우리 집이 옳고 그 집이 틀린 건 아닐 거야. 서로 다를 뿐이지라고 시댁을 이르던 영묘는 남편이 폐암을 앓으면서 드러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재벌가의 물신성과 속물근성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오래된 농담’, ‘전망 좋은 병실’, ‘눈뜬 죽음’, ‘고여 있는 시간 속의 뱀눈’, ‘다섯 통의 이메일에서는 경호가 죽어가는 과정과 시댁 일가의 기행,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의심하고 단념하며 괴로워하는 영묘의 모습이 긴장감있게 서술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영묘와 송 회장 일가 사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 영묘와 경호에게도 있었고, 영빈과 아내에게, 혹은 영빈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종국에는 영빈과 현금에게도 새파란 이를 드러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의 군상들은 불현듯 느끼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한꺼풀 농담으로 덮는다. 아슬아슬한 위기감과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농담으로 인생을 줄타기하는 것은 비단 이 책의 인물들만은 아닐 것이다.


임예슬 간사
yesl@shin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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