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경식 교수(관광영어과)
우리나라도 올해 추석부터 장거리 고속버스 노선에 현재의 우등고속버스보다 시설이 훨씬 더 좋은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도입한다고 한다. 이 버스에는 크고 안락한 좌석뿐 아니라 항공기의 기내 편의시설과 같이 다양한 영화, 게임, 음악 등을 제공하는 터치스크린 개인 모니터, 무선 충전기, USB 포트, 개인 테이블 등 많은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버스 여행과 관련해 한 가지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수년전 서호주의 퍼스에서 데이투어(day tour)하는 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있다. 외국에서 여행을 할 땐 주로 렌터카를 이용하지만 서호주는 워낙 넓고 관광지가 여기저기 흩어져있기 때문에, 혼자서 대표적 관광지인 웨이브락과 피나클 사막투어를 가기에는 버스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적합했다. 버스투어는 관광버스를 타고 퍼스시내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해 저녁 9시쯤 돌아오는 당일 장거리 버스여행이었다. 대표적 관광지 2곳과 작은 마을 하나를 둘러보는데 거의 13시간이 걸리는 일정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전체 여정 중 8시간이나 되는 만큼 버스 좌석은 넓고 쾌적했다. 항공기의 기내처럼 실내 화장실도 구비되어 있고 적당한 편의시설도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프리미엄 버스 수준은 절대 아니다.
버스기사는 운전사 겸 관광가이드 역할을 해서 마이크이어폰을 끼고 운전하면서 자주 주변을 설명해 주었다. 약 20여명의 손님들이 하루 동안의 여행에 동참했는데 출발 전 중년의 기사가 인사를 하면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오늘 가장 보고 싶은 건 무엇이냐, 혹시 무슨 기념여행을 왔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가졌다. 어느 노년부부는 서호주 여행이 결혼 40주년 기념여행이라고 했고, 어떤 젊은이는 CF에 나온 웨이브 록의 웅장한 그 장면을 확인하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라고 했으며, 또 어떤 대학생은 무작정 떠나온 배낭여행이라고 했다. 이렇듯 버스투어 관광객들의 국적, 연령과 목적은 참으로 다양했다. 장거리 운전이 피곤할 텐데도 기사는 끝없이 이어질듯한 긴 여정을 손님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농담을 해가며 분위기를 띄웠다.
어느새 점심이 되어 다 같이 작은 마을의 카페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낯선 손님들은 각자의 여행 스케줄부터 호주 여행의 에피소드,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여행지과 최악의 여행지 등, 소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나중에는 동물 보호, 인구 감소, 지구 온난화와 같은 거창한 주제까지 확장해가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물론 그런 대화의 주제들은 전문 지식이나 토론을 위한 게 아니고 단지 더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작은 마을에 들러 티타임을 갖기도 했는데 참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 마을은 들어가는 입구가 하나로, 지형상 우기에 집중적인 호우가 내려서 도로가 침수되면 길이 없어져서 고립되기 일쑤고, 우기가 끝나면 다시 새로운 길이 생겨서 매년 마을 주변의 지도가 바뀌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큰 불만 없이 자연에 순응하고 산다고 한다. 2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가 없어 홈 스쿨링을 하며 외지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는다. 그런 작은 마을의 한 집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음료와 다과를 먹는데 가격은 입구에 있는 항아리에 각자 알아서 돈을 넣으면 된단다. 그 집의 카페는 창고 같은 곳을 개조해서 간단히 쉴 수 있게 꾸민 소박한 곳이지만 테이블마다 예쁜 야생화로 장식하고 정성껏 직접 만든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그곳 사람들은 살면서 외진은 물론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 이렇게 관광객들이 잠시 들러 함께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정말 차를 마시는 동안 집주인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애완견까지 다 데리고 나와 마치 시골장터에 온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그곳 사람들에게 관광버스는 외부사람들과 만나는 마을의 큰 이벤트였다.
그렇게 꼬박 13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여정을 끝내고 헤어질 때는 서로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음 여행 스케줄을 확인하고, 또 같이 한잔 하러 가고… 그렇게 새로운 친구들이 또 새로운 여행을 만들어갔다. 인상적인 버스투어였다.
뉴질랜드 남섬 퀸즈타운의 중심가에는 아름다운 와카티푸 호수가 있다. 주변에 설산과 푸른 하늘을 끼고 있는 이 빙하호는 오래된 증기 유람선을 타고 관광할 수 있는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늘 만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배를 탔는데 배 안에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각 나라의 대표적인 노래 한 곡씩 피아노로 연주해준다. 우리나라의 노래로 ‘사랑해’라는 오래된 가요를 연주했는데 한국어 가사를 꽤 잘하셨다. 여행에 지친 심신을 익숙한 노래로 위로받으니 다시 기운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 노래가 나오면 어느새 피아노 주변에 모여 열심히 따라 불렀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 노래가 끝나면 소액을 팁으로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데 그럼 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연주를 한다. 어떤 사람은 직접 자신이 좋아하는 곡의 연주를 주문하기도 한다. 한국, 중국, 일본, 영어 노래 등 다국적 노래 한마당이 끝나면 마지막 무대는 모두가 합창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마무리되었고, 모든 일정을 끝내고 배에서 내리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여행은 자연, 사람, 문화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많은 여행을 했지만 대부분 그 여행의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스타일로 여행을 하지만 그 여행길에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사연을 만난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할까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어떤 추억을 만드는가도 의미가 있다. 여행은 혼자 떠나지만 여행을 마칠 땐 혼자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여러 편의 장치가 설치된 럭셔리한 버스나 배, 기차와 같은 하드웨어도 필요하지만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콘텐츠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 학생들도 긴 여름방학 동안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한 번씩 해보기를 바란다. 편리한 여행보다는 편안한 여행을 경험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