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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보셨나요? - 비즈니스중국어과 노승숙 교수

등록일 2016년12월07일 15시52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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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보셨나요?”,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아직……”. 필자의 대학시절에 유행하던, 소위 말하는 우스갯소리중 하나이다. 어떤 이는 독서량을 뽐내는 자랑 섞인 질문에 대한, 위트 있는 대답이라 말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독서에 대한 강박적인 세대를 희화화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우리 시대의 독서는 이처럼 무슨무슨 혹은 누구누구의 책을 읽었느냐가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그 내용이 어떠했고 내가 무엇을 느꼈으며,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대학생이라면 각자의 책장이 이러 저러한 고전작품으로 채워져 가는 걸 보면서 뿌듯해 했고,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책의 서명과 작가만큼은 꼭 기억해두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누가 물어보면 냉큼 대답해야 하니까……

30대 중반까지 나의 사적인 독서는 대체 이러하였다. 전공이 문학비평이었으니 연구대상이 되는 작품은 어찌되었든 끝까지 정독하고 분석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 외의 독서는 나에게 있어서 사적인 독서이다. 내가 읽는 책의 장르도 확장되고 선호하는 분야도 달라졌지만, 30대 중반 이후 사적인 독서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책을 중간에서 덮을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책을 펼치면 끝까지, 그것도 겉표지에서부터 맨 뒷장 파본은 교환해 드립니다까지 읽어야 독서가 마쳐지던 청년시절의 독서와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몇 번의 이사로 다소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아직 책장에 남아 있는 책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저 책의 내용이 뭐였지? 라는 생경한 느낌이 든다. 이런 자괴감 아닌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파트린느 쥐스킨트의 문장을 보고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이라는 크나 큰 동질감과 함께 더 이상 의미 없는 독서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독서는 더 이상 누구누구에게 이러저러한 책을 읽었노라고 이야기하기 위한 독서가 아니니까 말이다.

전공서적만으로도 이미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책장이 가득하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나는 요즘 전공서적을 제외하고는 예전만큼 책을 사지 않는다. 방학이 되면 이번에는 꼭 책장을 정리해서 30%는 줄여야지라고 마음먹어도 매번 잘 안될 만큼, 책을 못 버리기도 한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두고두고 읽을 만한 책들만 서가에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두 번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라면 구입할 이유가 없고, 중간에 덮어버릴 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선은 빌려서 보고 꼭 필요한 책만 구입하다보니 아무래도 내가 사는 책의 양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이제는 대학시절처럼 다독을 위해 허겁지겁 책을 읽지 않는다. 시간의 제약에서도 많이 자유로워졌으니, 자연히 늘 곁에 두고 여러 번 읽는 책들은 늘었다. 이제는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읽었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졌다.
노승숙 교수(비즈니스중국어과)


리영희 선생님은 다독에 비해 문학작품을 즐겨 읽지 않으시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분이 독서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의무감이라는 단어를 쓰셨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시대 독서의 대부분이 이 의무감에서 시작되었고, 끝까지 책과 사투를 벌인 이유도 아마 이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무감에 독파하는 책들이 우리에게 남겨 줄만한 의미가 별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단지 그래도 난 이 책을 읽었어라는 초라한 위안정도일 것이다. 한 번 손에 든 책은 어찌되었든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들이 그 동안 즐기는 독서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와 맞지 않는다면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있어야만 책을 펼치기가 수월해진다. 다 읽지는 못하더라고 그 책과 마주하는 과정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마치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모두 친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과 교류하는 과정이 귀한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어릴 적부터 유독 책 읽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책들이 양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 양서들이 모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책들은 아닌 것이다. 이렇듯 간단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 셈이다. 휘청거리는 나를 향해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고, 가끔은 살뜰한 위안과 격려도 건네주고, 각박해져가는 마음 바닥을 촉촉이 적셔주는, 나만의 오래된 책벗이 가까이 있다면, 그 삶은 조금 더 넉넉하고 풍요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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