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정 교수(관광영어과)
시대마다 유행하는 단어들이 있다. 요즘에는 혼밥, 혼술 등 혼자 하는 것에 대한 단어들이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기류에 관광업계서도 ‘혼행’이라는 말을 만들고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정보와 상품을 만들고 마케팅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여행의 특성을 주마간산(走馬看山)격 여행 또는 Stamp Tour라 말한다. 여행의 질보다 양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비평가 수잔 손택은 “여행이 무엇인가를 사진에 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배낭여행도 배낭만 멘 관광객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영국의 철학자이며 명상가인 브하그완은 여행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유익함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타향에 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며, 마지막 하나는 그대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대학교 1학년 19살 때 나는 남들보다 늦게 사춘기를 맞았다. 그 당시 내 머릿속을 채웠던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 채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었고, 말 그대로 방황과 반항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28일간의 대학생 배낭여행에 겁도 없이 도전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도전이라기보다는 반항에 가까웠다고 보였다. 여행을 통해 무언가 얻어오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벗어나고 싶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었다.
공항에 모여 첫 모임 때 친구 없이 혼자 온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렸고, 여행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다. 심지어 28일간의 여행을 위한 가방이라기보다 1박 2일 MT가는 사이즈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너무 작은 가방에 일행들의 염려와 불안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었다.
내가 선택했던 여행은 인솔자가 있는 배낭여행의 형태여서 숙소와 교통편이 제공되고 목적지에 인솔자가 함께 가면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각자에게 주는 패키지와 자유여행 혼합형의 배낭여행상품이었다.
처음 도착한 대영박물관에서 4시간의 자유 시간을 주고 점심을 각자 해결한 후 입구에서 다시 만난다는 인솔자의 이야기에 다른 일행은 친구들과 함께 흩어졌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일단 박물관에 입장해서 시간을 때우자는 생각에 4시간을 꼼꼼하게 박물관에서 보냈었다. 그 이후에도 그와 비슷한 경험들로 외로운 시간들을 보내며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을 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내 모습에 눈물 나는 시간들을 보내다가 에펠탑이 보이는 언덕에서 저녁밥으로 산 바게트빵과 우유를 먹으며 보는 풍경에서 어딘가 마음이 정리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후 체코 구시가지 광장에서 커피 한 잔 놓고 5시간을 하염없이 앉아있으면서도 이국적인 장소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로마 땅을 밟은 그 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내 삶이 진정으로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는 독일의 문호 괴테처럼 어둡고 습했던 나의 눈이 밝아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28일이 되는 날, 다른 일행들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MT수준의 작은 가방을 멘 나는 일정을 연기해서 42일 만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유럽에 있는 42일 동안 아무 생각하지 않고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멈춰 서서 천천히 이국적인 곳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하는 사이 내 안의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이사벨 엘버하르의 ‘여행을 할수록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말처럼 말이다.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웃고 떠들며 힐링하는 여행도 나에게는 충전이 된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혼행을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맞춰 계획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 혼행의 장점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2시간이라면 나는 남한산성에 올라 수어장대까지 천천히 걸으며 씨앗호떡과 수제 츄러스까지 먹고 내려온다. 적당히 가쁜 숨을 통해 막혀있던 호흡이 풀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6시간이라면 정동진까지 기차 타고 가서 동해의 바다를 눈으로 듬뿍 담아 보다가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나의 개인지 나를 잡아먹을 늑대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시간)에는 동해의 바다를 청각으로 느끼면서 반복적인 파도 소리에 마음속 실타래와 머릿속 먼지를 털어내고 온다.
여행지의 풍경을 사진기뿐만 아니라 나의 눈과 마음에도 담고, 굳이 관광객의 시각으로 보려 하지 말자. 직접경험을 통해 오감으로 정보와 감성을 채워 나의 삶이 풍성해진다면,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나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준다면 여행의 가치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이다. 나는 혼행이야말로 약 상자에 없는 치료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