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지만 모든 말이 같은 무게로 번역되지는 않는다. 어떤 단어는 다른 언어로 옮기는 순간 뜻이 옅어지거나 설명이 길어져야만 이해될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은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그 사회가 관계를 맺고 감정을 표현해 온 방식이 압축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에는 특히 번역이 어려운 표현들이 많다.
눈치 챙겨야지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눈치다. 눈치는 단순히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아니다. 상대의 말투와 표정, 침묵의 길이, 주변 분위기까지 종합해 행동을 조절하는 감각에 가깝다. 영어의 awareness, tact, social sense 같은 표현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이는 눈치가 지닌 미묘한 긴장감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스페인어의 darse cuenta 상황을 알아차리다, tacto 눈치 있는 태도, sentido del ambiente 분위기를 읽는 감각 역시 일부 의미를 옮길 수 있을 뿐이다. 한국어에서 눈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일종의 생존 기술처럼 작동한다. 눈치 없다는 말에는 둔하다는 평가를 넘어 함께 있는 사람들의 흐름을 깨뜨렸다는 비판까지 담겨 있다.
한국인은 정
정은 감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지만, 번역이 거의 불가능한 단어로 꼽힌다. 영어에는 affection, attachment, bond, fondness처럼 정과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이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도 정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스페인어의 apego 애착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단어들은 모두 따뜻한 감정을 가리키지만, 정이 지닌 시간성과 복합성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정은 사랑이나 우정처럼 긍정적인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반복된 만남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인 익숙함과 미움이 있어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의 끈, 피하고 싶어도 남아 있는 감정까지 함께 포함한다. 그래서 정은 느끼는 감정이라기보다 관계에 남아 있는 흔적에 가깝다. 영어와 스페인어에서는 결국 오래 쌓인 감정적 유대, 시간이 만든 관계의 무게라는 설명으로 풀어 쓸 수밖에 없다.
배려합시다
배려 역시 단순한 친절과는 다르다. 배려에는 상대가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이는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한 번 더 조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거나 한 발 물러서는 선택이 배려가 되기도 한다. 영어의 consideration, thoughtfulness로 옮길 수 있고 스페인어의 cuidado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국어의 배려에는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는 조심스러움과 함께 상대의 감정과 분위기를 미리 살피는 눈치의 요소가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배려는 개인의 성품이나 친절함을 넘어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관계 기술에 가깝다.
한이 맺히네
마지막으로 한은 한국어를 대표하는 감정어로 자주 언급된다. 한은 억울함과 슬픔,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오랜 시간 해소되지 않은 채 축적된 상태를 의미한다. 영어의 resentment 원망, grief 슬픔, sorrow 비애 같은 단어들이 일부 의미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한이 지닌 지속성과 복합성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스페인어의 rencor 원한, pena 깊은 슬픔, dolor 오래된 고통 역시 ‘한’의 한 단면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태도와 기억 속에까지 스며든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한은 개인의 감정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적 경험과 맞닿아 형성된 정서로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삶의 태도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우리가 살아온 언어의 흔적
이처럼 번역이 어려운 말들은 한국어가 복잡하거나 불완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그 사회의 관계 방식과 감정 구조를 얼마나 정교하게 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말은 생각을 옮기는 도구를 넘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기록하는 흔적이 된다. 번역되지 않는 단어들은 그 흔적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언어의 얼굴이다.
하시은 기자 tldmsha@g.shing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