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약속이 취소됐다. 역시나 기대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어떤 것도 기다리지 말아야지’하고 매 순간 되뇌면서도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오후였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긴 싫어서 무작정 걸었다. 아직 열려 있는 서점에 무심코 발을 들였다가 ‘연애’, ‘이별’, ‘위로’ 큼지막하게 나열된 단어들에 아연실색하며 나와 버렸다. 나는 여전히 저런 말들에는 면역이 없다. ‘헤어졌다’, ‘끝났다’ 같은 말에는 알레르기가 있어 우연히라도 맞닥뜨리면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어쩌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거나 아예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다.
저 멀리 달아나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향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지금 누굴 만날 상태가 아닌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갔다. 쏟아져 내리는 나를 억류하려고 버둥버둥. 마치 바퀴벌레 같다. 저번에 친구가 약속 잡는 게 취미냐고 말해서 속으로 그럼 ‘약속 취소당하는 건 특기인가보다’ 생각했다. 안 그래도 구름 대신 세상의 빗물을 다 짊어진 것 처럼 지치고 울적한데 왜 굳이 약속을 무리하며 잡나 생각 했으나 이거라도 있어야 좀 사는 거 같아 그러는 것 같다. 어쩌면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내 마음 좀 알아달라고, 잘하지도 못하는 떼를 쓰고 있나 보다.
취소된 약속을 대신해 나처럼 비틀비틀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넘실거릴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 초면인 열한 명의 사람들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웃음을 안주 삼아 마시는 술자리에서 나도 그들처럼 행동했다. 술 게임에서 내게 마음을 표한 아이에게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클럽은 시끄럽고 울적했다. 어쩌다 보니 자꾸만 같이 다니게 된 아이의 제안으로 내가 마음에 든다던 아이와 셋이 번호 교환을 했다. 내일이면 잊어버릴 사람이 담배 사러 가는 길을 따라나서며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사람의 감정의 무게를 재보다가 어찌 됐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꿈처럼 씻겨 내려갈 찰나였다. 시종일관 웃고 있었지만, 도무지 내가 섞일 수 없는 공간에 갑자기 떨어져 버린 것 같은 쓸쓸함. 어쩔 수 없이 떠오른 한 달간 내가 만난 사람들을 나열해보다 울적해져서 클럽을 나왔다. 술과 잠에 취해 휘청휘청 첫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도착하자마자 씻고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숨이 막혀 잠에서 깼다. 아픈 꿈을 꿨다. 꿈에서 누군가에게 가슴 아픈 말을 듣고 깨면 기분이 이상하다. 꿈은 내 무의식에서 나온 거니깐 결국 그 아픈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일 테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를 다시 확인한 것 같아서 서글퍼진다. 마음이 어지러워 아플 때면 생각나는 친구에게 연락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감정을 나누는 일은 내 감정을 줄이자고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참 어렵다. 나 스스로 부정적이라고 단정 지은 감정들을 언어로 건져낼 때는 ‘조금’이라는 단어를 끼워 축소하는 못된 습관마저 있다. 기댈 곳을 찾아 멍하니 투명한 연락처들을 넘기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가끔은 누군가 내 안부를 물어봐 줬음 좋겠다. 요즘도 너를 무너지게 하는 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꺼번에 몰려오냐고. 매일매일 버텨내기 위해 감정을 감추고 숨기며 살아가냐고. 그러다 버티는 것도 힘들어지면 너를 힘껏 안아 다독여줄 사람 하나쯤은 있냐고. 다시 기나긴 하루가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