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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유리 가족-임하림 학우(미디어콘텐츠과 2)
등록일
2019년09월11일 09시00분
남자가 일찍 집에 돌아왔다. 세상이 빠르게 돌기 시작한다. 고성과 억센 단어들이 날아다닌다. 익숙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이 자리에서 한 뼘 떨어져 있는 나는 그저 벗어나고 싶다.
지겨운 레퍼토리 속에서 저들은 무엇을 바라는 걸까. 어차피 ‘완벽’한 남자는 도무지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의 잘못보다도 그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남자에 진저리가 난다. 날 선 대화가 서로를 베어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본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가엽다.
이 모든 것이 버거워진 남자가 그만 이곳을 떠나겠다고 선언하고서야 기나긴 전투는 끝이 났다. 남자는 끝내 알지 못할 죄를 불러내며 자기가 다 잘못했다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한다. 여자는 여전히 할 말이 많지만 이미 발을 끌며 방으로 들어가는 패잔병에게 그 말이 들릴 리 없다. 그들은 어쩌다 한집에 살 게 되었을까.
엄마는 어쩌다 아빠랑 결혼했어? 내가 열일곱쯤 되었을 때 처음 그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인생의 동업자를 잘못 골랐지. 여자는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면접 좀 잘 보고 뽑지 그랬어. 나는 지쳐 보이는 여자가 안쓰러웠다. 그러게, 그땐 50대의 식견이 없었으니깐. 여자의 대답은 반 농담조였지만 긴 한숨이 담겨 있었다. 종종 생각해 본다. 이 여자가 내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쩌면 지금쯤 어느 잡지사의 인터뷰에 응할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
유리는 뜨거운 열기에 사람의 숨이 더해져 만들어진다. 처음 만들 때는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흠집들로 금세 빛을 잃는다. 그리고 빛을 굴절 시켜 실제와 다른 형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 가족은 잘 만들어진 유리 가족이었다. 분명 누군가 원해서 만들어진 공예품이었지만 한번 긁힌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왜곡된 모습으로 남아 서로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생겨난 상처의 결을 따라 더 깊게 파이기만 하는 악순환의 고리 끝에 유리 가족은 소리 없이 깨져갔다. 낡을 대로 낡아 외관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골동품 속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아우성이 맴돈다. 어차피 유리로 막혀버린 두 귀에 이 무수한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숨이 막힌다. 나는 유리가 되고 싶지 않아.
아빠가 일찍 퇴근하셨다. 세상이 또다시 빠르게 돌기 시작하고 고성과 억센 단어들이 날아다닌다. 지독한 기억의 악순환 속에서 저들은 무엇을 바라는 걸까. 어차피 서로 듣지 않는데 이 무수한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숨이 막힌다. 나는 내 방에 있지만 갇힌 것 같다.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다.
신구학보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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