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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돌려줘, 빼앗긴 문화재

등록일 2019년12월04일 09시00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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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수많은 문화재가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가 소유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도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일본, 미국, 독일, 중국 등 총 20개 나라에 16만 8천여 점의 우리 문화재가 흩어져 있다. 실제로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2017년 4월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 미국, 독일 순이다. 일본은 71,422점, 미국은 46,404점, 독일은 10,940점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사 간 것일 수도 있고 선물한 것일 수도 있으나 약탈당한 문화재라고 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직도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빼앗긴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자.

문화재의 눈물
우리의 문화재는 끊임없이 이어졌던 외국의 침략과 내란으로 인해 파괴되고 또 약탈당해왔다. 경주의 황룡사에 있던 목조 9층탑은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되어,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웅장했던 목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16, 17세기에는 40여 년 간격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버리거나 약탈당했다. 특히, 임진왜란 중 일본은 전투 부대 이외에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할 목적으로 6부라는 특수 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들은 전투 부대의 후방에서 우리 문화재를 조직적으로 약탈했고 수많은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꽃피게 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수월관음도’는 40여 점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4점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해외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어려운 문화재 환수
부당하게 다른 나라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을 문화재 환수라고 한다. 그 첫걸음은 해당 문화재가 약탈당한 것인지, 누군가가 사 간 것인지, 선물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돌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아 2013년 기준으로 8,070여 점밖에 환수받지 못했다. 원인을 살펴보면 문화재를 약탈한 나라들이 돌려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때문에 약탈한 문화재를 원래 주인인 나라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협약이 있지만, 법이 아니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환수를 받으려면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유출된 문화재가 워낙 많아서 관련 기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표적인 문화재 이야기
-직지심체요절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1377년(고려 후기)에 금속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현재 존재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에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이 있다면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다. 책은 본래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 상권은 분실된 상태이고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 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다. 1886년 한·프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 대리 공사로 부임한 콜랭 드플랑시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해 갔는데, 이때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 의궤
의궤란, 조선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건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재이다. 여기에는 왕의 결혼, 세자 책봉, 장례 등의 행사가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기록 유산은 주로 글이 중심이지만, 조선의 의궤는 그림이 중심이고 글은 부연 설명 정도다. 또한,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만큼 사람들의 옷 색깔, 모양, 크기가 아주 상세히 묘사돼 있어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에 높은 벼슬을 가진 양반은 물론 글을 모르는 백성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외규장각 의궤가 약탈당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에 의해서다.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수많은 의궤를 약탈하여 프랑스로 가져갔고 그 후 1991년부터 의궤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2011년 4월과 5월에 걸쳐 모두 반환되었다. 완전한 ‘반환’이 아닌 ‘5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한 일괄 대여’ 형식이지만, 이는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21세기 문화재 반환의 매우 중요한 선례가 됐다.

-고려청자
처음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푸른 옥(玉)을 갖고 싶어 했는데, 너무 귀하고 비싸서 하는 수 없이 흙으로 옥색이 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몽골의 침입으로 전쟁을 하느라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워지자 고려인들이 「고려청자」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이는 송나라의 청자보다 훨씬 아름답게 재탄생해 송나라 사신이 ‘고려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총독부 고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선 미술품 수장가로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3월 통감에 취임한 이후 고려청자 수집에 진력하여 천여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고려청자 중 일본 천황에게 바친 103점이 가장 훌륭한 고려청자로 꼽히는데 이는 1966년 한일회담 때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

문화재를 더욱 빛낸 노력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땀 흘리던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간송 전형필 선생과 박병선 박사가 있는데, 간송 전형필 선생은 사재를 털어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 환수에 앞장서 온 선각자이다. 풍족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돈을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쓰는 것 대신 우리 문화유산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데 사용했다.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외규장각 의궤를 최초로 발견했다.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사표를 강요받은 그는 그 후 10여 년간 개인 자격으로 도서관에 드나들며 외규장각 의궤의 내용을 정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기틀을 마련해 145년 만에 대여 형태로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방법으로 문화유산을 지켜낸 애국자와 선각자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우리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아끼며 사랑해야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날갯짓이 문화재를 보존하고 문화재 환수에 다가가는 큰바람이 될 것이다.



신지선 기자
jisund5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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