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살인자의 기억법

등록일 2013년12월10일 00시00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무척 짧다, 이 책. 149페이지, 그것도 제목과 차례를 빼면 142페이지다. 142페이지라는 한정된 페이지 안에서 이야기는 묵직하게, 그러나 박진감 넘치게 달리다가 마지막에 와서 급정거를 하는 느낌이다.

주인공인 연쇄살인범 병수는 올해로 일흔이 된 노인이다. 제목이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데, 무시무시한 범죄소설의 주인공보다는 난롯가에 앉아 손자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이 어울리는 나이다.

사실 주인공의 현재 직업은 더 이상 연쇄살인범이 아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인을 한 것은 45. 이미 25년 전에 은퇴를 한 몸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말년에 찾아온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차츰차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몸이다. 142페이지의 짧은 이야기 마지막까지 그가 살아있을지 어떨지도 걱정된다. 그런 그가 25년 만에 살인을 결심한 것은 인근에 출몰한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을 지키기 위해서다.

작가의 필체는 담담하고 남성적이고 수평적이라 모든 사실이 자세하고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나간다. 그러나 책의 끝부분에 이르러서 독자들은 당황한다. 본문 중 인용되는 금강경, 반야심경과 니체는 공통적으로 유()와 무()의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개인이 인식하는 이 세상의 일부, 혹은 전부가 거짓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병수가 겪고 묘사했던 그의 주변 세상은 완벽한 진실일수도, 혹은 그의 기억 속에서 창조된 하나의 희극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야기의 주안점은 병수와 연쇄살인마의 피 말리는 두뇌게임도, 촉 좋은 형사와 은퇴한 연쇄살인마의 추격전도 아니다. 무너져가는 세계로부터 밀려오는 끔찍한 공포가, 한 때 일반인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선사하던 연쇄살인범 병수 자신에게 덮쳐오는 데에 대한 짤막한 기록과,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일 수 있는 이 악마적 농담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딸에게 접근하는 연쇄살인범과 마주한 병수가 오랜만에 느끼는 살인자로서의 희열, 그러나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기억 속의 용의자는 마치 컴컴한 방 안의 검정고양이 같은 존재라,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병수 자신의 희망사항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 방의 불을 켤 때까지는. 실은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자신의 세상과의 싸움이었으리라. 결국 병수의 세상이 모두 무너졌을 때 또 하나의 연쇄살인범은 그렇게 기억의 파편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오직 살아서 지옥을 상상하는 사람만이 그 아비규환의 불바다에 빠질 수 있다. 주인공 병수는 무너지는 세상에서 자기의 잊힌 공포와 죄책감을 마주하고 스스로 지옥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오로지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지옥에 떨어진 병수 하나 뿐이다. 날조되고 허술하게 보수된 그의 세상이 아니라, 인간 김병수가 스스로 창조하고 걸어 들어간 유일한 세상이자 완벽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내 살인의 과정을 정직하게 썼다.
첫 시의 제목이 '칼과 뼈'였던가? 강사는 내 시어가 참신하다고 했다.
날것의 언어와 죽음의 상상력으로 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듭하여 내 '메타포'를 고평했다.

"
메타포라는 게 뭐요?"

강사는 씩 웃더니- 그 웃음, 마음에 안 들었다-메타포에 대해 설명했다.
듣고 보니 메타포는 비유였다.

아하,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비유가 아니었네, 이 사람아.


-본문-

 

 

이형렬 기자 pak_88@naver.com


 

 

 

 

 

 

이형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보도 여론 사람 교양 문화

포토뉴스 더보기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