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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의로 돌아온 큰 보답-배희진 학우(방사선과 3)

등록일 2022년06월29일 09시00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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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없어도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언니는 나와 달리 눈치가 매우 빨라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작년 초 늦은 밤 학원이 끝나서 역까지 뛰어가 막차에 겨우 몸을 실었는데,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힘들다고,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문자에서 길을 잃은 분리된 자음들, 연속해서 반복되는 같은 말들이었다. 어쩌면 술에 취한 채 연락한 것 같기도 했다. 우울하다고는 하지만 정작 이유를 물으면 그것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해내지는 못했다. 으레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그렇듯, 언니도 취한 채 무언가를 회상하다가 자신과 이야기해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때 무척 피곤했다. “도와줄게” 한 마디로 해결될 문제였으면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내게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고민을 들어주기엔 내 코가 석자였다. 결국 “코로나 블루 같은데 지금은 자고 내일 되면 괜찮아질 거야. 밤낮 바뀌지 말고 시간이 늦었으니까 다음에 얘기하자”라고 얼버무리며 답장을 끝냈다. 언니도 “아, 그런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해. 졸리긴 했는데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라며 자러 갔다. 어설픈 끝맺음과 완벽한 술주정이였으며 나는 이 뒤로 언니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 내가 답장해야 했던 문자는 “아, 미안해 어제 내가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고마워! 어제 바로 자고 일어났는데 조금 나아진 것 같더라고! 난 지금 카페에 왔는데 이건 캐모마일 티고, 앞에 같이 있는 친구는 얼그레이래!”라며 사진까지 보내온 내용의 문자였다. 어젯밤의 일로 갑작스레 가까워진 것 같던 그 관계에서, 나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4월이 돼 개강을 하고 나는 다시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학교에선 박물관을 다녀오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문제는 박물관을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진까지 찍어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동기들끼리 두 명 이상 동행하여 서로 찍어주러 다녀오는 것이 효율적인 루트였다. 그때는 대부분의 강의가 비대면이어서 내가 말을 붙여본 동기들이 많지 않았고, 또 그런 눈치싸움엔 영 소질이 없었기에 불이익을 고려했을 때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었다. 근데 그때 언니는 그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본가가 있었는데, 자신이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 마침 서울로 올 계획이라며 같이 가자고 했다. 속으론 무척이나 고마웠는데 막상 나는 “그래? 고마워 다행이다.” 따위의 무미건조한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그냥 대충 인증하는 용도로만 간단히 찍으면 되는 사진 과제를 언니는 어떻게 어떤 조명 아래에서 찍으면 예쁘게 나오는지 알고 있다며 정성스레 찍어주었다. “이런 데서 사진 한 장을 찍어도 제대로 찍는 게 사람이 다시 보이는 법이야” 라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했다.

 

그렇게 제출을 못할 것만 같았던 과제는 결국 무탈히 제출할 수 있었고, 그때의 짤막한 답장이 도움이 되어 그 상황까지 이어질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최근 들어서 핸드폰에서 자주 길을 잃으면 언니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신구학보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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