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은 올해 개교 50주년을 맞이했다. 동시에 신구학보사도 50주년을 기념하였는데 정말 뜻깊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학보사를 만들고 개척한 과정과 에피소드들이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 대학 학보사가 가진 50년 역사의 흐름 속 큰 물결이자 그 시작을 열었던 1대 주간, 원선자 교수님을 모셨다. 먼저 교수님 소개를 부탁드렸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1974년 3월 신구대학교가 개교할 당시부터 1988년까지 신구학보의 주간을 맡았습니다. 14년 동안 주간을 맡아 신구대학교와 신구학보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제2대 주간으로는 류재엽 교수님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신구대학교 학보사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져 이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아시는 것처럼 신구대학교는 신구문화사라는 출판사가 모체가 되어 설립된 대학 교육 기관입니다. 신구문화사는 1950년대 초반에 설립돼 아동문학, 한국문학, 한국역사, 대학교재, 수험서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서적과 교양서적을 출판하던 국내 유수의 출판사였습니다. 6.25전쟁 직후 문화 불모의 국내 사정을 감안할 때, 국민 교육을 위한 양서 출판이 절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설립자 이종익 박사님은 그런 사명감에서「세계전후문제작품전집」,「한국의 인간상」,「영원한 인간상」,「신구문고」,「국어국문학사전」등 우리 출판사에 영원히 기억될 도서들을 기획 출판하셨습니다. 이 무렵에 축적된 자산을 기반으로 설립자께서는 직접 교육의 꿈을 실천하고자 신구학원을 설립하시고, 이곳 성남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신구대학교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때 신구문화사의 모든 출판권을 재단의 기금으로 출연하고 무엇보다 산업역군을 양성하는 기술교육이 절실하다고 판단하여 2년제 전문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저는 신구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하기 이전부터 신구출판사에 입사하여 편집 책임자로 근무하다가 개교와 동시에 교양 국어 교수직을 담당하면서 신구학보 편집인 겸 주간을 맡게 되었습니다.”
초대 주간 교수로서 역임하셨던 당시, 학보사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셨을 텐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에 대해 여쭤보았다.
1974년 3월 신구대학교가 개교하고 같은 해 11월 1일 신구학보가 창간되었습니다. 이는 신구학보가 창간하는 데 8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구학원 이사장이셨던 이종익 박사님은 국내에서도 손꼽을 만한 편집의 권위자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사장이시다 보니 신구학보의 창간과 편집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던 거지요. 창간 당시 편집 일을 자문해주셨던 면면을 살펴보면, 신구학보 창간에 보였던 애정과 노력을 알 수 있습니다. 창간호에서 볼 수 있는 "신구학보는 내일을 투시하는 우리들의 눈이다. 신구학보는 슬기를 듣는 우리들의 귀이다. 신구학보는 옳은 말을 하는 우리들의 입이다. 신구학보는 새 삶을 창조하는 우리들의 손이다”로 서술되는 신구학보의 네 가지 사시를 제정하셨던 분은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계시던 이어령 박사님이셨고, 서울대 정병욱 교수, 서울대 정한모 교수, 문학평론가 백철 중앙대 교수님 등 여러 석학들이 이후 신구학보의 편집 방향 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신구학보는 창간부터 가로 편집을 단행했습니다. 그 무렵 일간지 모두와 연세대를 제외한 대학 대부분이 세로로 편집된 학보를 발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글 전용으로 가로 편집된 신구학보의 등장은 당시 대학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학보사를 경험하셨던 교수님께서 보시는 과거와 현재의 학보사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져 질문을 드렸다.
“개교 50주년을 맞이했으니 외관부터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음은 당연하겠지요. 개교 당시는 본관 건물 한 동 밖에 없었어요. 본관 건물 앞에서 5개 학과 200명의 입학을 거행했습니다. 제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대운동장의 정비와 함께 별관과 남관, 실습관, 우촌관도 세워졌지요. 제가 퇴직한 후 학생회관, 체육관 외에도 여러 강의동, 실습동 등이 신축되어 그야말로 완전한 모습의 대학 캠퍼스가 완성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성남시 상적동에 있었던 신구 실습 농장이 신구대학교식물원으로 정리, 재단장되어 수도권의 이름난 식물원으로 탈바꿈한 일은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외적인 성장 외에도 200명의 신입생으로 출발했던 신구 가족의 수가 6천여 명으로 대폭 늘어난 사실은 대단한 발전의 상징이지요. 학생 수의 대폭 증가, 실험실습실의 현대화, 멋진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 등을 보고 있자면 질적, 양적인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신구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주간 교수 재직 당시 함께 했던 기억에 남는 학생 기자에 대해 답변을 부탁드렸다.
“학생 기자는 1학년을 대상으로 2차례의 과정을 거쳐 뽑았어요. 1차 필기시험과 2차 면접이었지요. 1차 필기시험은 국어와 일반상식, 논술 위주였고, 2차 면접은 1차 합격자를 대상으로 진행했어요. 매년 5명 내지 6명 정도 선발하다 보니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6개월의 수습과정을 거친 후 학생 기자로 임용되었는데, 학생 기자들은 주간 교수의 지휘 아래 취재와 편집, 교정 등의 일을 했고,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학보 기자로 선발되었으니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어요. 기억에 남는 학생 기자들은 많이 있으나 몇 사람을 소개하자면 송병관(원예과, 현재 양재조경 대표), 이준상(방사선학과, 현재 의료기기 판매 업체 대표), 홍석우(축산과, 전 경기도의원) 등이 생각나네요. 지금도 학생 기자 출신 졸업생들이 자주 모여 친목을 도모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 여쭤보고 답변을 받았다.
“저는 개교 시절부터 교수로 근무했고 14년 동안 신구학보의 주간으로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학의 태동과 발전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면서 깊은 애정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판을 통한 사회 간접 교육과 더불어 대학 설립을 통한 직접 교육을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대학의 발전이 영원하도록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예빈 기자 smilebloomyebin665@g.shing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