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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계단의 회상

등록일 2021년11월17일 09시00분 URL복사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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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건물은 언덕 대학 캠퍼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중 방사선과는 동관 맨 꼭대기 6층에 자리 잡았다. 동관은 우리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한결같이 우뚝 솟은 모습으로 우리 대학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유광열 교수(방사선과)

 
내가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와 놀랐던 것은 화장실에 가려면 6층에서 3층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전의 학생들은 화장실을 가려면 동관 뒤편 재래식 공동변소로 나가야 했다고 하니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방사선과 학생들은 아래층의 다른 학과 학생들보다 더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서면 옥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었고, 철 따라 피는 꽃과 나무로 우거진 아담한 캠퍼스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층 학과의 텃세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엘리베이터는 학생에게도 비만의 주범이 될 수 있다. 굳이 6층 정도의 건물에 꼭 엘리베이터가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쁜 일에 쫓기다 보면 언제쯤 동관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을까? 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5월, 지옥의 중간시험을 마치고 천국의 백마체전이 열리면 우리 학과는 한 가지 종목 정도는 입상하였다. 시상식이 끝나면 우리는 트로피를 앞세우고 동관 옆 잔디밭에 모여 조촐한 안줏거리를 준비하며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 기분에 들뜬 학생들은 밤늦도록 남아 백마상 분수대에 빠져보기도 하고 취중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성이 차지 않은 녀석들은 정문 옆 LA 잔디에서 밤새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젊은 영혼을 미친 듯 노래했다.
 
격전의 막이 내리고 파김치가 된 학생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들은 의례적으로 모든 공로가 동관 계단에서 단련된 체력 덕분이라며 대견하게도 칭찬을 양보하였다. 그러나 어떤 여학생들은 두툼해진 자신의 종아리를 내보이며 한탄하기도 하고, 계단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한여름 찜통 강의실에서 수업이 시작되고 출석을 부를 때면 문밖에서는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 복도를 달리는 소리, 그러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자빠지는 소리,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비록 몸은 땀범벅이 됐지만 겨우 지각을 면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정말 사연이 많은 계단이었다.
 
언제나 눈을 반짝거리며 친구와 종알거리기를 좋아하던 K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높은 교단에서 내려다보면 유난히 눈이 초롱초롱 빛나서 나는 초롱이라고 불렀는데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목발을 짚고 다녔다.
 
이른 아침 초롱이가 동관 로비에 들어서면 몇몇 기다리던 친구들은 곰살맞게 어깨를 부딪치며 인사를 나눈다. 한 아이는 초롱이의 가방을 챙기고, 두엇은 그를 도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3층이나 4층쯤에 올라서서 힘에 부칠 때면 남학생은 초롱이를 둘러업고 남은 계단을 올라간다. 졸업 후 초롱이는 취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행히 작은 병원에 취업할 수 있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해 전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가지 비밀을 내게 알려줬다.
 
“긴 쪽을 잘라냈어요!”
초롱이의 이야기는 아주 간결했다. 큰 수술이었지만 아직도 초롱이를 챙기고 있는 옛 친구들 덕분에 용기를 내었다는 것이다. 짧은 다리에 맞추어 긴 쪽의 대퇴골을 잘라내는 대퇴골 절단 수술, 남들은 좀 더 큰 키를 갖고 싶어서 있는 키도 늘이는 판인데, 그 작은 키에 생뼈를 깎아 내다니...
 
아주 오래전, 한 현자께서 참된 우정에 관해 묻는 자에게 이르시길,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하루가 다르게 메말라가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뼈를 때리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우리의 삭막해진 삶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른 아침 동관의 적막한 로비에 들어설 때면 나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빤히 보이는 한가운데에 서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이기 시작한다. 계단이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그 옛날 함께 땀 흘리던 젊은 시절의 친구들을 아직도 못 잊었노라고. 그는 이제 홀로 있기에, 나는 기꺼이 그의 부름에 화답하고 냉큼 그를 향해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높은 곳을 향해 힘차게 오른다.
신구학보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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